일본여행/홋카이도

무한의 여정, 그리고 표류-홋카이도 여행기 8

나그네 신군 2015. 6. 30.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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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달리기 (하코다테-삿포로, 특급 호쿠토)


 다시 5시간에 달하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비에이에 도착하는 시간까지 고려하게 된다면 6시간이 넘는 여정, 사실 한국에서도 이렇게 긴 여정을 한적은 KTX가 개통한 이후로는 그렇게 많지가 않다. 물론 지난해 포항에 축구를 보기 위하여 우리 모임사람들과 갈때 8시간 올때 7시간이 넘는 여정을 다녀온 적이 있었지만 당시에는 극심한 고속도로의 정체로 인하여 시간이 늦춰진 것이 불과하였다. 또한 2년전 부산에 갔을 때 해운대로 향하는 고속버스를 이용한적이 있었는데 6시간 30분이 소요되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둘다 차가 밀리지 않는다면 사실 4시간 3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물론 속된 말로 근성남이 되어 청량리에서 출발하여 부전으로 향하는 무궁화호에 앉아 그냥 실려가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내가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타성에 젖어버린 나는 그러한 모험보다는 KTX나 비행기로 빠르게 전국을 다니고 싶었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결정적으로 다음날 출근을 해야하는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차치하고 빠르게 이동하여 세계를 느끼고 다시금 빠르게 복귀하여 다음날을 준비해야하는 문제에 봉착해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내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철도를 따라 실려가고 싶었고 지금 내가 보는 풍경들을 조금이라도 더 내 머리 속에 담아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고료가쿠역까지는 수많은 장면들을 머리 속에 담아 둘 수 있었다. 다행히도 옆 사람이 아직 탑승을 하지 않은 관계로 차창밖을 스쳐지나가는 다양한 풍경들을 머리 속에 담아 둘 수 있었다. 그래봐야 서울역에서 영등포역 정도 거리에 불과하지만 그 시간만큼은 최대한 담아두고 싶었다. 지난번 하코다테에 왔을 때 거의 테러급으로 야구에 관한 신문과 잡지를 본 남성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래야만 했다. 


많은 것을 기억하고 담아내기엔 시간이 충분하지는 않았다-2015년 6월 6일 고료가쿠역


 열차가 고료가쿠역에 도착하였다. 살며시 아릿다운 여성분이 내 옆자리에 앉길 바랬지만 당연히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아주머니 한분이 오시길래 자리를 비켜드리고 창가석에 앉도록 배려해줬다. 좀 심심하면 이야기라도 해볼까도 싶었지만 진짜 친한사람이 아닌 이상 말수가 적은 나로서는 그런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아니 애시당초 이곳에 왔을 때 그런 환상 따위는 가지지 않았다. 내 성격을 잘 알기도 하고 4차례의 일본자유여행 그 밖에 셀 수 없이 많은 홀로여행에서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옆에서 아주머니가 전혀 짐을 올리지 못하고 있던 것이었다. 신장자체가 극단적인 일본은 사람들이 키가 작거나 키가 큰 두가지 중 하나로 나뉜 모습을 많이 봐왔는데 이 아주머니는 키가 작아 선반위에 가벼운 가방조차 올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스테레오 타입의 한국인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한국인 특유의 오지랖을 발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정말로 도와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켜보고 있던 나는 너무나도 답답해서 대뜸 말을 걸었다. 


"도와드릴까요?"

"괜찮습니다."


 말주변이 극도로 없는 나로서는 한국말도 바로 대답을 못하는 판에 일본어로 즉각반응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거기다 나는 어릴적부터 소음성 난청 증상이 있어 바로 바로 말길을 못알아 들을때가 있다. 에라이 모르겠다 하고 그냥 이렇게 답해버렸다.


"아...네..."


 하지만 이 아주머니 계속 낑낑대고 있었다. 일본인들에게 말 없이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는 행동은 매우 불쾌한 행동이 될 수 있지만 보는 내가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비록 내가 키 168의 단신이지만 선반정도야 가볍게 닿는 키이기 때문에 가방을 그대로 낚아 채 선반 위에 올려줬다. 그리고 아주머니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고맙습니다."라고 전하였다. 무언가 입에서 나도 웅얼대고 싶었지만 평소에 한국어도 즉각 말이 안나오는 나는 그냥 "네네"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역시 큰 실례이지만 순발력이 이 모양이라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아주머니는 자연스럽게 MP3를 귀에 꽂으시고 독서를 좀 하시다가 잠에 들고마셨다. 덕분에 주변의 풍경을 눈치 보지 않고 충분히 만끽할 수 있었다. 물론 드문드문 깨는 것 같았지만 주무시고 계시는 모습이 너무나도 고맙게 느껴졌다. 


'아주머니 이건 가방을 올려드린 삯이라고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차여행은 역시 맥주 아니겠는가? 홋카이도에 있던 1주일간 알콜기운이 없어졌던 적은 단 하루도 없었다.-2015년 6월 6일, 특급 호쿠토 안에서


실패했던 사랑들에 대하여


 나름 아침을 든든하게 먹었다고 생각했지만 계속 걸어서 그런지 몰라도 금방 배가 고파왔다. 거기다 맥주까지 한잔 마셨더니 뭐라도 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여 하코다테역에서 산 950엔짜리 오징어 에키벤을 열었다.[각주:1] 열어다보니 하코다테의 신선함을 그대로 품은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에키벤의 특성상 장시간 보관이 필요한 경우가 많아 방부제를 쓴다거나 조미료를 많이 넣는 인상이 강하긴 하지만 안에 가득찬 해산물들의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절로 침이 삼켜졌다. 역시 이런걸 보면 기차여행의 낭만은 도시락과 맥주다.―혹자는 계란과 사이다가 아니냐고 하겠지만 계란은 까기가 귀찮고 나는 탄산음료를 잘 안마신다.―철마의 쇠륜이 철도를 긁으며 앞으로 나아갈 때 주변의 경치를 벗삼아 먹는 도시락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맛있다. 


재료의 질도 좋았고 맛도 좋았다.-2015년 6월 6일 슈퍼 호쿠토 안에서


 물론 혹자는 분위기 때문에 더 맛이 있다고 느꼈을것이라는 말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안에 들어간 새우이며 연어 가리비 오징어의 맛은 정말 끝내줬다. 물론 우리네 조모 또는 증조모에서부터 이어져온 만능의 맛 속칭 '마법가루의 맛'이 좀 강하긴 했지만 그냥 뭐 맛있으면 된 것 아닌가? MSG가 음식 고유의 맛을 가려줘 재료 본연의 맛을 죽인다고도 하고 건강에 안좋다는 소문도 있지만 어짜피 음식의 질이 좋으면 되는 문제고 건강에 안좋다는 이야기 역시 오래 전에 연구를 통해 논파가 되었기 때문에 감칠맛을 특별히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충분히 추천해줄 수 있는 맛이었다. 


 가볍게 식사를 한 뒤 배를 채우고, 차내에 배치된 잡지도 잠깐 읽어보고 내가 사온 가이드북도 잠시 읽어보았다. 홋카이도 특산 토카츠우유로 간식을 삼고 이로하이 물을 마시면서 여정의 여백을 즐기며 삿포로에 향하는 동안 내 자신을 생각해봤다. 마침 내가 왔던 길 그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니 과거에 대해 복기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로 사랑을 한 것은 7년전의 일이었다. 너무나도 짧고 부족했던 시간, 나 혼자의 욕심과 우울함에 빠져 일방통행을 강요했었던 것 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내가 그 아이와 조금이라도 교감을 할려고 했는지 그냥 내게 사랑을 달라고 강요한건 아닌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물론 이건 구차한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이곳에 온 이상 내가 그동안 걸어왔던 길들에 대해 되짚어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가 그리고 나에게 사랑을 이야기 하였던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함께 추억을 공유했던 상대들이 떠올랐다. 


 항상 나는 모든 것을 짊어지려 했었고 내가 책임을 가져가겠다고 하였다. 그렇게하여 남는 것은 오로지 상처 뿐이었다. 항상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이별을 하였고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주기도 하였다. 때로는 철이 없이 행동하다가도 어떤 일이 생기면 책임회피를 하고 싶지 않았다. 순간의 분노가 차오르더라도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생각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논리법칙에 의하여 나름의 결론을 내놓고서 모든 책임을 떠 맡아 내 자신을 더더욱 구렁텅이에 넣어놓고 전혀 자유로워지지 못하였다. 


면벽수행에 가까웠던 삿포로 가는길-2015년 6월 6일 특급 호쿠토 안에서


나는 살아갈 수 밖에 없어.


 그렇게 나는 내가 실패했다고 생각하였다. 청운의 꿈을 안고 패기와 함께 입성하였던 대학교 역시 말려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주변관계가 악화되었고 다른 사람들과 달리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수업을 듣는 일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 누구와도 마음을 열고 싶지 않았고 누구와도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혼자 식사를 할때 단체로 우루루 몰려와 자리를 비켜달라고 할때가 가장 힘들었다. 친구들은 떠나갔고 그 외로움을 지탱해줬던 그녀들 마저 등져버리자 점점 난폭해지고 술에 빠져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비현실적인 목표에 경도되어 미쳐가기 시작하였다. 독립할 능력도 되지 않으면서 독립을 시도하였고 생활고라는 것에 시달리기 시작하였으며 밥을 먹지 못해 이틀씩 굶는 것은 예삿일이 되어버렸다. 계속해서 술을 마셨고 오로지 생존을 하는 이유는 축구를 볼 수 있어서였다. 그때는 정말 나를 유지해주는 유일한 존재였고 내 구원의 안식처였고 삶을 지탱해주는 요소였던 것이다. 지금 바쁜 삶을 살고 있더라도 항상 축구장에 가 있는 이유가 나를 살게 해줬기 때문에, 바로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게 희망을 줬기 때문이다. 


 다시금 종교생활에도 귀의를 해볼까도 하였지만 어디에도 내가 갈 곳은 없었다. 교회에 가더라도 두렵게 느껴졌고 과거에 가졌던 트라우마들이 생각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내게 웃는 모습이 무서웠고 가시복처럼 뻗어있는 내 몸의 가시는 더 이상 사람들의 접근을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가장 멍청한 선택을 하였으나 나의 소심함이 나를 구하여 치료 받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개선이 될 여지는 없었고 이윽고 정신건강과 신체건강 모두가 안좋아지고 있었다. 독립을 선언한지 1년이 되었을때 쯔음, 집으로 돌아가 학교를 쉬겠다고 이야기 한 뒤 작은 목표들을 하나하나 실천하면서 내안의 벽을 깨부수기로 마음을 먹었다. 물론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약을 타고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고 때로는 밖에 나가 바람을 쐬며 목표들을 세웠다. 하나가 여행, 그리고 하나가 어학자격이었다. 이 모든 것을 2009년말미까지 완성하는 걸로 하여 아르바이트를 하고 친구들을 다시 만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하였다. 이 모든 것이 20살에서 25살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처음 일본에 갔을 때-2009년 12월 21일 도쿄 이케부쿠로 위클리맨션


 실패한 사랑에 대해 복기하면서 내 삶에 대해서도 사유하였다.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나의 미래,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면서 겪었던 우여곡절들이 스쳐지나갔다. 이제는 내가 살아오면서 준 변화들 가운데 다섯번째 변화를 주기 위해 열차에 올라탔다. 조금은 갑작스러운 준비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지루하고 구태의연한 삶을 벗어나 보다 활동적인 삶으로 바꾸고 싶었다. 하나 하나의 틀을 빠져나오고 또 하나의 장애물을 벗어나 신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중간과정이자 그리고 그것을 사유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그리고 '실패했던 사랑에 대해' 극복하고 보다 건설적인 미래를 찾기 위해 내달리기 위해 왔다. 


단 10분간의 만남이었지만 반가웠어 삿포로-2015년 6월 6일 삿포로역. 



  1. 실제 이름은 イカわっぱいる弁 사실 이것도 정확치 않다. 무척 긴 이름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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