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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가 시작한지 30년 그리고 31번째 시즌. 동대문 운동장에서 시작한 K리그는 당시 실업과 프로가 연합리그를 하는 형태로 구축되었고 연고지를 두고하기 보다는 지역을 순회하면서 리그를 진행하였다. 그러한 기조는 일화가 창단하던 시절까지 이어졌으며 프로와 실업이 분리가 되고나서야 비로소 지역연고를 기반으로 한 리그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것도 코미디에 가까운 것이 총 6팀 중 3팀이 서울연고(일화, LG, 유공)을 가지고 있었고 나머지 세팀은 모두 영남팀으로 포철, 현대, 대우 등이었고 이미 그 시대에는 프로야구가 지역에 정착하며 뿌리내려서 축구가 열리는 동대문 운동장은 텅텅빈 관중석과 여기저기 파여서 패스조차 안되는 잔디만이 우리의 프로축구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1993년 일본의 J리그가 출범을 하는 동안에도 실력만 믿고 인프라나 투자에 대한 자각이 없었고 그냥 전업선수로 운동만 시키면 된다는 식의 리그 운영이었다. 지역에서의 지지도 없었으며 중립경기라는 병신같은 경기는 1997년까지 이어졌다. 그래도 희망은 없던 것이 아니었지만 1993년 전북버팔로는 제대로된 스폰서도 없었으며 재정적인 지원도 없어 1년만에 해체 됐었다. 다행히 전북지역에 어느정도 지분이 있던 현대자동차가 그 팀을 인수하면서 호남지역에도 축구의 꽃이 피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94년 미국월드컵과 2002년 월드컵 유치선언을 통해 인프라구축이나 리그의 수준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93년 월드컵예선에서 일본에게 패배했던 기억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어 94년 미국월드컵에선 투혼의 불꽃을 태우며 분전했지만 2무1패로 16강 진출에 실패했으나 당시의 분전으로 많은 이들이 축구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관심이 한 1g늘어나는 계기가 된다.
그 이후 축구팀들이 상당히 늘어나게 되는데 95년 포항제철 광양제철소의 여가선용과 전남지역 축구붐 확보 그리고 광양축구전용구장의 활용을 위해 전남드래곤즈가 리그에 가담하였고 96년에는 축구에 대한 관심과 투자를 모색한 삼성블루윙즈(당시엔 그랬다)가 리그에 가담하면서 9개까지 늘리게 된다. 이어 1997년에는 대전지역 기업들이 모여 대전시티즌을 만들게 되면서 대한민국 프로스포츠 중 가장 많은팀이 리그에 참여하는 리그가 된다.(당시엔 야구8팀 농구8팀) 삼성이 축구판에 들어오면서 몇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94년 월드컵의 분투에 감명받은 김영삼 대통령은 축구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됐고 프로팀이 적고 인프라가 엉망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김영삼 대통령은 이건희 삼성회장을 불러 축구단을 만들어주기 원했고 그에 호응하여 유럽식 축구단 경영을 모토로하는 현재의 수원블루윙즈가 생겨날 수 있었다.(내가 김영삼 전대통령에게 유일하게 감사하고 있는 부분이다) 또 한가지 일화는 당시 기존에 있던 프로팀들이 삼성의 축구판 입성에 상당한 반감을 가졌는데 어떻게든 막아보고 엿이나 먹으라는 심정에서 축구발전기금 30억을 뱉으라고 했다. 당연히 당시 삼성은 그냥 냈고 이 30억은 추후 신생구단의 발족과 2부리그 창설의 큰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다.
또한 1997년은 프로축구가 크게 변하는 계가되는데 서울의 전용구장을 대기업들로 부터 뜯어내기위해 희대의 병신같은 짓을 한다. 바로 서울공동화선언인데 서울에서 야구에 완패하기도 하고 2002년 월드컵을 대비해 전용구장도 지어야하는데 겸사겸사 축구흥행도 시킬 겸 일화, LG, 유공 세팀을 모두 인근도시로 쫓아낸 사건이다.ㅡ생각건데 당시 LG는 매일같이 다목적 돔 드립을 치던 시절이었다. 아마 LG를 노리고 한 짓일 것이다ㅡ이후 이 희대의 병신 짓은 훗날 해당 지역축구팬들에게 상처를 크게주는 단초가 된다. 그나마 이때 유일하게 잘한 일이 있는데 지역연고원년으로 삼고 지역의 이름이 선두로 오고 이어 기업명이 오는 방식으로 팀명을 바꾸면서 이를 모두 인용하였고 현재는 오로지 지역명으로 불리고 있다. 이는 분명 구단의 소유는 기업이 될지라도 그 목적성은 지역민에게 있으며 지역의 대표성을 지니는 것을 명시한바 축구가 드디어 지역의 사랑을 받는 스포츠로 발돋움하게 되는 사건이 된다.
1993년 일본의 J리그가 출범을 하는 동안에도 실력만 믿고 인프라나 투자에 대한 자각이 없었고 그냥 전업선수로 운동만 시키면 된다는 식의 리그 운영이었다. 지역에서의 지지도 없었으며 중립경기라는 병신같은 경기는 1997년까지 이어졌다. 그래도 희망은 없던 것이 아니었지만 1993년 전북버팔로는 제대로된 스폰서도 없었으며 재정적인 지원도 없어 1년만에 해체 됐었다. 다행히 전북지역에 어느정도 지분이 있던 현대자동차가 그 팀을 인수하면서 호남지역에도 축구의 꽃이 피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94년 미국월드컵과 2002년 월드컵 유치선언을 통해 인프라구축이나 리그의 수준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93년 월드컵예선에서 일본에게 패배했던 기억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어 94년 미국월드컵에선 투혼의 불꽃을 태우며 분전했지만 2무1패로 16강 진출에 실패했으나 당시의 분전으로 많은 이들이 축구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관심이 한 1g늘어나는 계기가 된다.
그 이후 축구팀들이 상당히 늘어나게 되는데 95년 포항제철 광양제철소의 여가선용과 전남지역 축구붐 확보 그리고 광양축구전용구장의 활용을 위해 전남드래곤즈가 리그에 가담하였고 96년에는 축구에 대한 관심과 투자를 모색한 삼성블루윙즈(당시엔 그랬다)가 리그에 가담하면서 9개까지 늘리게 된다. 이어 1997년에는 대전지역 기업들이 모여 대전시티즌을 만들게 되면서 대한민국 프로스포츠 중 가장 많은팀이 리그에 참여하는 리그가 된다.(당시엔 야구8팀 농구8팀) 삼성이 축구판에 들어오면서 몇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94년 월드컵의 분투에 감명받은 김영삼 대통령은 축구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됐고 프로팀이 적고 인프라가 엉망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김영삼 대통령은 이건희 삼성회장을 불러 축구단을 만들어주기 원했고 그에 호응하여 유럽식 축구단 경영을 모토로하는 현재의 수원블루윙즈가 생겨날 수 있었다.(내가 김영삼 전대통령에게 유일하게 감사하고 있는 부분이다) 또 한가지 일화는 당시 기존에 있던 프로팀들이 삼성의 축구판 입성에 상당한 반감을 가졌는데 어떻게든 막아보고 엿이나 먹으라는 심정에서 축구발전기금 30억을 뱉으라고 했다. 당연히 당시 삼성은 그냥 냈고 이 30억은 추후 신생구단의 발족과 2부리그 창설의 큰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다.
또한 1997년은 프로축구가 크게 변하는 계가되는데 서울의 전용구장을 대기업들로 부터 뜯어내기위해 희대의 병신같은 짓을 한다. 바로 서울공동화선언인데 서울에서 야구에 완패하기도 하고 2002년 월드컵을 대비해 전용구장도 지어야하는데 겸사겸사 축구흥행도 시킬 겸 일화, LG, 유공 세팀을 모두 인근도시로 쫓아낸 사건이다.ㅡ생각건데 당시 LG는 매일같이 다목적 돔 드립을 치던 시절이었다. 아마 LG를 노리고 한 짓일 것이다ㅡ이후 이 희대의 병신 짓은 훗날 해당 지역축구팬들에게 상처를 크게주는 단초가 된다. 그나마 이때 유일하게 잘한 일이 있는데 지역연고원년으로 삼고 지역의 이름이 선두로 오고 이어 기업명이 오는 방식으로 팀명을 바꾸면서 이를 모두 인용하였고 현재는 오로지 지역명으로 불리고 있다. 이는 분명 구단의 소유는 기업이 될지라도 그 목적성은 지역민에게 있으며 지역의 대표성을 지니는 것을 명시한바 축구가 드디어 지역의 사랑을 받는 스포츠로 발돋움하게 되는 사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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