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그리고 한국축구/K-league

프로축구 30년에 관한 이야기-2 마지막

나그네 신군 2013. 5. 8.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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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K리그는 크게 주목받기 시작하는데 바로 안정환과 고종수의 출현일 것이다. 텅텅빈 운동장엔 활기가 돋기 시작했으며 월드컵예선의 후광까지 겹치며 운동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는 1999년까지 이어져 고종수, 이동국, 안정환 등의 신세대 스타들이 출현과 함께 지역내의 인기까지 더해져 경기장은 매일같이 붐볐다. 울산같은 경우는 자리가 없어 트랙에서 경기를 볼 정도였으니 어느정도의 인기였나 짐작이 가는가? 그러나 영광은 잠시 국가대표의 저질경기력과 스타선수들의 잇따른 해외진출은 K리그의 인기를 급속히 식게하였고 2002년 월드컵에서 16강은 진출해야한다는 공감대아래 FC KOREA라고 불릴정도로 국가대표경기만 주구장창하면서 리그는 소외됐고 2001년과 2002년초반까지 텅빈 그라운드 속에서 서포터즈의 함성만 들릴 뿐이었다.

2002년 월드컵이 지나 한국은 4강에 올랐고 유래없는 축구광풍에 휩싸이게 되는데 다시금 축구장엔 사람이 넘치게된다. 최신식의 축구전용구장들 그리고 엄청나게 좋아진 축구 인프라와 월드컵에서 생산된 스타들은 흡인요소를 충족했고 그 스타들을 보기위해 그라운드를 찾았다. 그러나 그 것도 잠시 여전히 전근대적인 운영방식을 비롯해 어떻게 팬심을 끌어당겨야 하는지 모른채 K리그는 다시금 잊혀졌고 애국심 또는 의무감에 봤던 리그였기에 클럽에 대한 사랑도 없었고 즐기는 방법도 몰랐기에 자연스럽게 그들은 그라운드에 오지 않는다.ㅡ솔직히 말해 클럽축구가 그다지 와닿지도 않았고 즐길 줄도 몰랐다는게 답이다. 거기다 지금의 야구같은 복고풍적 인기도 없었다. 애시당초 뿌리가 없었으니 당연했겠지만ㅡ다만 달라진 점은 적어도 썩어가는 똥잔디 위에서 축구를 안해도 된다는 점과 그때를 계기로 현재의 축구팬덤이 완성이 됐다는 점이다.

그러나 연맹이 만들어놓은 대형폭탄이 하나 있었으니 그 이름하여 '서울공동화'. 상술했듯 여러 잇속을 챙기기 위해 벌인 일이었으나 그 누구도 경기장을 짓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거기다 IMF직후인데 돈이 남아나는 기업도 없었으니 그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64000명 수용의 서울월드컵 구장이 주인이 없고 수도라는 상징성에 팀이 없다는게 말이되냐는 여론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3년 본격적으로 서울구단에 대한 논의가 들어가는데 당시 서울월드컵경기장 입성조건으로 150억에 달하는 서울입성비와 30억에 달하는 축구발전기금을 내고 새로 창단할 정신나간 사람들은 나타날리 없었다. 그리고 슬슬 여기저기 떡밥을 흘리면서 연맹은 서울에 입성할 팀을 무려 공모씩이나 하는 짓을 감행한다. 당시 이에 응했던 팀은 안양과 부산이었고 예상대로 안양이 되면서 안양에 뿌리내리고 있던 팬층을 걷어차버리는 만행을 저지른다. 거기다 부산역시 떨어졌지만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었는데 그나마 있던 축구팬들 마저 떠나면서 역대 K리그 최저관중수까지 갈아치우게 된다.ㅡ지금이야 K리그 챌린지의 막장구단 고양이 매번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지만 그 이전까지 절대 깨지지 않던 기록이었다.ㅡ이후 2006년에는 부천이 제주로 야반도주하면서 서울공동화의 주인공 세팀은 모두 연고지를 변경한 역사를 지니게됐다.

그런 암흑의 역사 속에서도 빛은 조금씩 비치기시작했는데 2002년 월드컵 이후 축구단에 대한 수요가 늘고 지역명을 붙일 수 있는 장점이 있자 업적을 위한 치적쌓기겸 지역민 여가선용을 위해 시민구단들이 연이어 창단하였다. 2003년 대구FC를 시작으로 2004년 인천유나이티드 2006년 경남FC 2009년 강원FC 2011년 광주FC가 창단하였고 2003년부터 상무가 리그에 참가하면서 16개 팀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2007년부터는 한국식 유스시스템을 도입하여 학원축구를 유지하면서 체계적인 방식의 유망주 양성을 시작했으며 주말리그제를 통해 학습권을 보장받고 학원과 클럽의 연계 그리고 지역 유소년을 위한 프로그램이 개발되면서 진정한 클럽축구로서 위용을 갖추게된다.

또한 이쯤하여 반강제이긴 하지만 구단들의 법인설립이 시작됐고 진정한 연속기업으로서의 축구단이 완성되는 기간이기도 했다. 물론 좋은 일만 있던건 아니었는데 2006년 무리하게 승강제를 구축하려던게 문제였다. 실업연맹과의 협약을 통해 승강제를 구축하려했는데 당시 16개팀이 될때까지 승격만 있고 16개가 되면 본격적으로 승강제를 한다는 골자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바로 그 망할 축구발전기금이 문제가 된다. 승격을 하게되면 실업연맹에서 프로연맹으로 가니 프로입장에서는 신생팀이 되는건데 신생팀은 30억을 뱉어야한다. 생각해봐라 어느 정신나간인간이 자신들이 쓰는 1년 예산을 한번에 쓸 수 있겠나. 결국 2006년 실업우승팀 고양KB와 2007년 우승팀 미포조선은 승격을 단념하였고 실업연맹과 프로연맹의 협약은 깨지게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AFC에서 ACL참여조건을 세운다. 바로 승강제 없으면 리그점수를 깎아버린다는 엄포를 놓았고 연맹은 이에대한 대책으로 최고리그의 팀수를 줄이고 하부리그를 만드는 방식으로 승강제를 실시하는 구상을 하게되었다. 이어 여러 떡밥을 제시하는데 망할 축구발전기금을 폐지하고 창단팀에게는 가입금 5억만 실업에서 전환하는팀은 가입금만 내고 3년간 30억의 지원금을 주는 골자로 창단을 유도하게된다. 단, 시민구단의 경우 지자체의 재정보증을 필요로 했는데 안정적인 재정을 위한 방책 중 하나였다. 또한 창단팀에겐 신인선수드래프트 우선권을 주면서 선수수급에 문제가 없도록 하였다.

이렇게해서 우여곡절 끝에 승강제가 실시되었고 올시즌부터 신규창단 2팀, 전환 3팀, 강등 2팀과 2군리그에 참여하던 경찰청을 포함해 8팀으로 2부리그가 시작되었다. 그야말로 30주년에 알맞는 새출발이라 할 수 있는데 21세기들어서 연맹이 뭔가 정신차리고 장기적인 구상에 의해 리그를 이끌어가고 있다는데 큰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다.

이처럼, K리그는 이제서야 제대로된 출발선상에 섰다. 유럽처럼 축구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축구단도 아니고 클럽이라는 시스템이 구축된지도 얼마되지 않았다. 프로가 생긴지 30년이 지난지금에서야 단순한 축구전업선수가 아닌 한명의 엔터테이너이자 상품이라는 개념이 생겼고 전국의 명문고들과 대학만 찾던 시절에서 벗어나 지역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클럽의 시스템 안에서 충성심을 가진 인재들이 지금이야 나타나고 있으며 이제야 전국리그에서 승강제가 생겨났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생기고 있으며 지역에 밀착하여 지역민들의 관심을 조금씩 끌어오고 있다. 이제 K리그는 다시태어나고 있다. 과거의 과오는 벗고 환골탈태한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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