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행복할 수 있다면 


 자전거를 탄지 어느덧 1시간 40분, 완전히 일상과 유리가 된 나는 이 세상을 다 가진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빠르고 어떻게 보면 느리게 스쳐지나갔던 풍경들...이제 비에이에서의 자전거 질주도 조금씩 종막을 향해 치닫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음 속에 있던 응어리들도 모두 바람과 함께 날아가고 있었다. 사진 속에서 봤던 라벤더 밭을 상상하며 자전거 패달을 밟아 나갔다. 이윽고, 호쿠세이노오카 전망공원에 도착하였다. 


 도착해서 보니 많은 패키지 관광객들이 와서 관광을 하고 있었다. 보통 후라노하고 비에이를 한 코스에 두고 패키지 관광을 하는데, 분명 후라노를 들린 뒤 아사히카와를 거쳐 자국으로 날라가는 중국인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한 공원에서 혼자 라벤더 밭을 누비며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지만 그러기는 글러먹은 듯 싶었다. 그래도 전망대에서 펼쳐지는 비에이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고, 아마 저들도 마찬가지의 감정을 가졌을 터, 담담히 자전거를 거치대에 올려놓고 잠근 뒤 한걸음 한걸음 전망대로 향해 걸어갔다. 


익숙한 듯 싶어도 생경한 풍경, 이 것이 이국을 여행하는 재미이리라- 2015년 6월 7일 비에이 


파노라마, 그리고 안식 


 조금 지대가 높아서 그런지 춥게 느껴지긴 하였다. 분명 시계는 11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햇빛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전날 하코다테에서 본 햇빛이 전부였다. 거기다 지난 새벽에는 비까지 왔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전망대를 향해 걸어가면서 동쪽으로 바라다 보았다. 그리고 그 곳에서는 내가 여지껏 보지 못하였던, 고산(高山)이 병풍을 이루고 그 고산들까지 끝없이 이어진 구릉지대가 펼쳐졌다. 그 가운데에는 비에이 시내가 우두커니 자리잡고 내 시선을 끌었다. 


 구릉들에게 시선을 잠시 뺏긴 후 라벤더를 찾아 나서기 시작하였다. 분명 6월이 되면 라벤더가 피기 시작하여 7월과 8월에 절정을 이룬다고 하였는데, 나는 오색찬란한 라벤다의 길보다는 옅게 이 세계에 조금씩 오색의 세계가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상상하였다. 이제 소녀의 티를 벗어나는 여성의 옅고 어설픈 화장과 옅은 부끄러워 하는 미소처럼, 그렇게 조금씩 성숙해 가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추웠던 날씨는 그런 여성과의 만남을 완벽하게 방해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본디 꽃이라는 것은 날씨가 맞아야 제때 개화를 하고 웃음 짓고 그리고 다음생을 그리는 순환을 하는데, 앞서 말했듯 일부 산간지역에는 6월에 폭설이 내려 제설작업이 필요할 정도였고 오호츠크 기단의 영향으로 계속해서 비와 찬바람이 몰아치고 있던 홋카이도였다. 


 이내 추웠던 날씨는 소녀에서 여성으로 변해가는 순간을 내게 뺏어갔고 만개 하기 전에 보이는 옅고 부드러우면서 부끄러움이 스며있는 웃음 대신 잔뜩 찌뿌린 채 환절기의 추위에 시달리는 라벤더만 남아 있던 상황이었다. 추위를 몹시 심하게 타는 나는 앙상하게 겨우 고개를 내밀고 있는 라벤더를 보자 더 움추려 드는 느낌이었다. 


때론 인생이라는것이 이런 것이다. 기대가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2015년 6월 7일 비에이. 


 여기저기 찌뿌리고 있는 라벤더를 뒤로 하고 공원을 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 언덕 꼭대기 평원에 위치한 주차장을 내려와 아래까지 S자 모양으로 층층이 내려가는 산책로가 있는데, 산책로 정상에는 각 산봉우리의 위치와 이름들이 쓰여 있는 파노라마 사진이 있었다. 또한 오른쪽에 솟아 있는 언덕 꼭대기에는 피라미드 모양의 전망대가 있었는데, 바로 전망대가 이곳 호쿠세이노오카 전망공원의 메인이 되는 곳이다. 층층이 쌓인 산책로와 전망대 사이에는 유리공방이 있어 관광객들의 지갑을 유혹하고 있었다. 


 먼저 산책로를 내려가기 전, 비에이를 둘러 싸고 있는 산들의 이름이 궁금하여 산책로 정상에 위치한 파노라마 사진에서 각 봉우리들의 이름을 보았다. 아사히타케, 토무라우시산, 오푸다테시케산, 베베츠타케, 비에이후지, 비에이타케케, 토카치타케, 카미호로카멧토쿠산, 후라노타케 등 무언가 유래를 알 수 없는 지명들을 가진 봉우리들의 이름들이 적혀 있었고 그 사진에는 모두 만년설이 있었다. 평균 높이 2,000m. 지리산이나 한라산보다 높은 산들이었다. 언제 찍은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들판이 푸른 빛을 띠고 있는 것을 보면 이맘 때 쯤 찍은 사진이 분명해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사진속 봉우리와 위치를 맞춰가며 전경을 바라보았다. 서울에서 1500km떨어진 이국에서 느끼는 광활한 구릉의 향연, 꼭 언젠가 다시 오리라고 이 작은 마을과 약속하였다. 다만 정말로 아쉬웠던 점은 날씨가 흐려 산들의 정상이 모두 가려져버렸다는 사실이다. 전날 내린 눈들도 볼 수 없었고, 6월에 내린 눈이 너무나도 신기해 그 장면을 멀리서 보고 싶었지만 야속한 구름은 내게 그런 기회를 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며 조금이나마 고개를 내밀고 있는 라벤더를 보며 산책을 하였다. 


 그래도 푸르른 이파리들이 나의 마음을 훔쳐가고 있었다. 무지개 빛의 라벤더들은 태어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봄의 기운을 맞아 태어나 겨울이 올 때까지 살아갈 푸르른 이파리들은 '그 아이들은 없지만 내가 놀아줄게'라는 듯 나의 눈을 즐겁게하고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있었다. 


 굽이 굽이 산책로를 돌아 한켠에 있는 유리공방을 지나 다시 정상의 주차장으로 올라갔다. 내가 목표로 하였던 장면은 건지지 못하였지만 이 푸르른 잔디 그리고 푸르른 새싹들이 나와 놀아주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고 즐거웠다. 내 호흡기를 채워주고 있는 맑은 공기도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호쿠세이오카 전망대에서-2015년 6월 7일 비에이. 


무지개곶 찻집


 전망대에 올라서자 탁 트인 시야가 내 시선을 사로 잡았다. 구릉 사이사이 펼져져 있는 밭들, 그리고 그 사이에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는 비에이 시내까지 모든 것들이 내 치하(治下)에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조금한 도시의 영주가 되어 이 작은 세계를 지배하고 그리고 모두가 나를 찬양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높은 곳에만 올라가면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을 봐선 나라는 사람이 권력욕이 상당한 것은 맞는가 보다. 


 잠시 왕이 된 느낌을 잘 느끼고 전망대를 내려가 주차장에 위치한 특산물 코너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갔다. 특산물 코너에는 비에이 지역에서 나오는 특산물을 이용한 먹거리는 물론, 이곳 호쿠세이오카 전망공원의 사계를 느낄 수 있는 사진들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내 눈길을 끈 것은 바로 고로케였다. 


 일본을 몇번이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고로케를 단 한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는데, 이 곳에서는 반드시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이곳 비에이와 후라노는 옥수수와 아스파라거스도 유명하지만 밀이 참 유명한 곳인데 비에이산(産)밀로 만든 반죽과 비에이산 옥수수가 들어간 고로케라면 이 세상을 다 가진 맛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00엔을 주고 옥수수 고로케를 집어들었다. 바삭한 고로케 속에 옥수수가 톡톡 튀어 나올 때마다 조그마한 재미가 느껴지는 식감이었다. 여기에 홋카이도산 옥수수 특유의 달콤함까지 어우러지면서 내가 먹어본 고로케 중에 가장 맛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참 홋카이도라는 곳, 그냥 사먹는 음식조차 맛있다니...먹거리 탐방을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면 꼭 가보라고 하고 싶다. 


이 밖에도 가게가 더 있다. -2015년 6월 7일 비에이 


 오감만족 전망대 여행이 끝나고 다시 자전거로 향해갔다. 지도를 보니 왔던 길을 되 돌아가는 것을 추천하였지만 열차시간까지는 충분히 여유가 있어보였다. 그래서 조금은 돌아서 가보기로 하였다. 지도를 보니 '로그하우스 빵집'이라는 곳이 있었다. 순 밭 밖에 없는 곳에 빵집이라니, 왠지 드넓은 평야에 가게가 있을 것 같은 목가적인 풍경이 상상이 되었다.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자전거를 힘껏 밟아 나갔다.


 시간이 지나니 도로에 사람이 조금 늘어난 느낌이었다. 보아하니 대부분 중국인들로 보이는데, 이곳 비에이가 중국인들에게 인기관광지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프로그램이라도 나왔나? 아니면 여기가 배경인 일본 드라마가 중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일까? 그 답은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냥 중국에서 일본관광의 인기가 늘어난 것이었다. 엔화가 떨어지고 가처분 소득이 늘자 가까운 한국 대신 볼거리가 많은 일본으로 발길을 옮겨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잡생각들이 스쳐지나가는 가운데 어느덧 '로그하우스 빵집'에 도착하였다. 상상 했던대로 넓은 벌판 위로 우두커니 목조건물이 서 있었다. 이곳 주차장에는 연식을 알 수 없는 오래된 혼다 자동차가 한대가 보관되어 있었고 대대손손 물려준 듯한 목조 차고와 일본 영화나 소설에서 봐왔던 조그마한 목조카페와 같은 건물이 있었다. 왠지 모르게 케이크가 정말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겉모습이 너무나 예뻐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바라만 보았다. 


 맞은편에는 버스정류장이 있었는데, 풀밭 사이에 조그마한 벤치가 하나 놓여있었고 벤치 뒤로는 동그란 버스정류장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복잡한 도회지를 벗어나 아기자기한 장치들이 숨어 있는 곳. 언젠가 내가 삶을 마감할 때 이런 곳에서 유유자적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로그 하우스 빵집의 모습-2015년 6월 7일 비에이.


 이런 저런 사진을 찍고 풍경을 감상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자전거 역주행을 일삼는 중국인들의 모습이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런 불쾌함도 그저 너그럽게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주변의 풍광이 너무 예뻤다. 다음 일정이고, 비행기 티켓이고 뭐고 그냥 이 자리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 처럼 푸르른 들판과 아기자기한 목조 건물은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멀리하고 담백하게 재료의 맛을 살리는 음식을 먹으라는 듯 보였다. 


 홋카이도에 오기 전 읽었던 책이 바로 <무지개곶 찻집>이었는데, 마음이 너무 심란하여 주변에 책을 추천 받아 읽었던 책이었다. 별다른 입간판도 없이 바다를 끼고서 세워져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이 찻집은 정말 낭만적인 찻집이겠구나'라는 상상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물론 이곳에는 바다가 있지는 않지만 분명 이 '로그하우스 빵집'은 소설 속 찻집과 다를 바 없었다.

 

이별을 향해서...


 자전거를 돌려 비에이 시내로 향하였다. 다시 내가 올라왔던 길을 거슬러 내려가며 내가 지나왔던 길들, 그리고 풍경들을 돌아보았다. 올라오는 길에 제법 사람들이 많이 늘어난 느낌이었다. 아마 오늘 들어와 내일 나가거나 후라노로 향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었다. 올라오며 수동자전거를 빌렸다 낑낑대며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니 전동자전거를 선택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못해도 그 무거운 자전거를 끌고 2시간은 다녀야하는데 말이다. 언덕길도 생각보다 힘들고, 괜히 싸다가 일반 자전거를 빌린이들에게 애도를....


 눈 깜짝할 사이에 시내에 도착하였다. 2시간을 조금 넘게 탔나? 단 2시간에 불과하였지만 나에게는 12시간, 아니 24시간 처럼 느껴진 순간이었다. 그냥 반납을 할지 아니면 어딘가를 들릴지 고민하다가 '비에이정사무소'에 있는 전망대에 들리기로 하였다. 비에이에 우두커니 서있는 전망대는 사실 전날에 들리고자 했지만 이미 폐장시간이 넘어버려 들리지 못했는데 비에이 일정을 마무리하기에는 정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가는 사람도, 지나가는 차량도 거의 없는 골목을 지나 '비에이정사무소'에 도착하였다. 자전거를 잠궈두고 왕래하는 사람도 없어 보이는 엘레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자 비에이 시내와 내가 지나왔던 길들이 한 눈에 보였다. 


비에이관광안내소, 그리고 뒷편에 패치워크 미치가 보인다.-2015년 6월 7일. 


 사람 너다섯명이 들어오면 꽉차 보이는 공간에 음료수 자판기 조차 없어 보이는 전망대에 서서 마을을 내려 보니 조그마한 마을에 있을 건 다 있는 모양이었다. 스키장도 있고, 도서관도 있고, 팍팍한 삶을 사라가고 있는 우리와는 분명 다른 세계의 사람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사람들에게는 일상 가운데 하나이겠지만, 나에게는 분명 다른 세상임이 분명해보였다. 


 여행이라는 것이 바로 일상과 비일상과의 균열을 느끼고 누군가에게는 일상이겠지만 나에게는 비일상 속에서 항상 새로운 일을 겪는 시간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이 동네 사람들에게는 별 것 아닌 일이겠지만 나에게는 분명 특별한 일인 것이다. 


 내가 홋카이도에 와 걸어왔던 여행길들을 복기해 봤다. 첫날 신치토세 공항에서 이곳까지 왔던 길부터 시작해 비에이에서의 짧고 즐거운 추억을 마무리 하기 시작하였다. 언덕 뒷편에 펼쳐졌던 소중한 추억들이 누군가에겐 스쳐가는 잔상이었겠지만 나에게는 영원히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의 편린이 되었다. 이 순간이 영원할 수만 있다면 시간이 멈출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다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번 정류장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2015년 6월 7일 

 

Posted by 석유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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