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삿포로-아사히카와-비에이)


 3시간 15분을 달려 삿포로에 도착하였다. 열차가 3분간 연착을 하는 바람에 아사히카와행 열차로 갈아타는 시간은 12분에서 9분으로 줄어들었다. 담배를 하나 피고 갈아탈까 싶었지만 초행길이라는 마이너스 요소를 고려하여 곧장 다른 플랫폼으로 이동하였다. 수 많은 기억들 그리고 느껴지는 애상과 내 삶에 대한 모색은 끝을 맺을 줄을 몰랐다. 한국에서 1500km떨어진 철로 위에 고독히 앉아 차창 밖을 바라보며 사색을 즐기는 것, 이것이 바로 기차여행의 묘미일 것이다. 


-아사히카와와 삿포로를 오고가는 슈퍼카무이, JR홋카이도의 몇안되는 전동차량이다.-2015년 6월 6일 삿포로역 


 지난 3일전 나를 맞아 주었던 특급호쿠토를 대신하여 새로운 친구를 만났다. 바로 슈퍼카무이이다. JR홋카이도는 이름을 붙일 때 아주 특이한 전통이 있는데 보통 일반적인 광역철도망에는 특급이라는 것을 붙인다. (이건 일본 본토도 마찬가지) 하지만 일반적인 디젤동차가 아닌 틸팅동차의 경우 특급보다 조금 빠르다고 슈퍼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런데 슈퍼카무이 같은 경우는 틸딩동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슈퍼라는 이름을 받았는데 이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바로 JR홋카이도의 몇안되는 특급 전동동차이기 때문에 붙었다고 한다. 


 이러한 특이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이녀석을 타고서 아사히카와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내 뒷자리에는 후라노나 비에이로 여행을 가는 듯한 20대 초입의 여성들이 탑승하고 있었는데 발랄한 대화들이 오고 가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너무나도 걱정이 없는 순수한 모습, 저 틈 속에 끼어 나도 화기애애한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 속의 근심을 모두 잊어버리고 싶었다. 


스윙걸즈


 사실 이미 나는 하코다테에서 긴 시간 철도를 타고 건너와 매우 지쳐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삿포로에서 아사히카와를 가는 1시간 40분 조차도 힘겨울 정도였다. 여기에 아사히카와에서 다시 비에이까지 보통열차를 타고서 40분을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니 여정이 조금은 지겹게 느껴졌다. 그래도 따스히 내리는 햇볕, 광활한 평야, 지평선너머 보이는 눈쌓인 산정은 사계절을 한번에 느끼는 듯 싶었다. 


 참고로 이날 후라노 지역의 고지대에는 폭설이 내렸는데 현지에서도 6월에 폭설이 내린 경우는 매우 이래적이었던 관계로 뉴스에서도 놀라워 하는 분위기였다. 참고로 한국 같은 경우 4월이나 5월까지 강원도에 눈이 내리는 경우가 있는데 홋카이도는 위도는 하얼빈과 비슷하고 크기는 대한민국의 3분의 2, 대체적인 산들의 높이는 남한지역에 있는 산들보다 높은 수준이다. 여기에 오호츠크해에서 넘어오는 한랭습윤한 바람은 눈을 만들어내기 충분한 것이다. 


눈이 쌓인 곳은 내가 앉은 자리와 반대였기 때문에 왓카나이에서 오는길에 찍을 수 밖에 없었다.-2015년 6월 8일 소야 본선 아사히카와 부근


 시간이 지나자 뒷자리에 떠들썩 하였던 여성들이 매우 조용해졌다. 


'그래, 솔직히 100분 내내 떠들 수 없이 너희들도 사람인데'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햇빛이 저물고 회색 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분명히 아까 낮에만해도 날씨가 정말 좋았는데, 예보를 보니 아사히카와와 후라노, 비에이 등에는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 다음날 자전거를 타야하는 나로써는 당혹스러운 소식이었다. 이것도 모잘라 내일 아사히카와지역의 최고 기온은 불과 17도, 한국에서의 늦봄수준을 예상하고 왔던 내게 있어서 이 춥고도 추운 날씨는 고행길을 상징하는 듯 싶었다. 


 하코다테를 떠난지 약 5시간 여가 지나, 드디어 중간기착지인 아사히카와에 도착하였다. 본래 계획에서는 아사히카와를 허브로 삼고 아사히카와를 통해 입출국을 할려고 했던 계획이 있었는데 한국에서 아사히카와에 운항하는 비행기가 성수기 시즌에만 운행을 하는 덕에 그 계획을 과감하게 포기를 하였다. 그리고 이 폐기된 계획은 아주 적절하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아사히카와에는 정말 볼게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홋카이도 제2의 도시라고는 하지만 대한민국 강원도의 춘천시 수준에 불과한 동네로서 주요도시라고는 하나 정말 보잘 것 없는 동네였다. 


안녕? 아사히카와?-2015년 6월 6일 아시히카와 역 앞.


 그리고 열차에 내리는 순간, 엄청난 추위가 내 몸을 급습해왔다. 이때 나는 반팔 남방에 야상을 하나 걸치고 있었는데 날씨가 흐려 햇빛이 없는데다가 바람까지 불어대니 미칠 지경이었다. 일단 먼저 코인로커에 내 짐을 맡긴 뒤 하코다테의 무인양품에서 산 니트를 입어 추위를 막기로 하였다. 아사히카와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총 3시간여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정리를 하고 시내로 나갔다. 


 니트를 급하게 입고서 지도를 확인 한 후 토키와 공원으로 향하였다. 아시히카와역에서 토키와공원까지는 수원의 나영석거리처럼 보도블럭이 깔려있는 번화가가 이어져있는데 토키와공원까지 직선으로 이어진 길은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지나 목적지로 향하라는 무언의 메세지 같아 보였다. 반듯하게 세워진 빌딩, 그리고 그 사이로 지나가는 수 많은 행인들, 타지에서 온 과객인 나는 여기서 일탈을 느끼는 듯한 감정이었다. 


 오후의 여유를 즐기며 길거리를 배회하던 중 어디서인가 트럼펫의 울림이 들리기 시작하였다. 무언가 여기서 축제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초등학생들로 추정되는 아이들의 합주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곳에서는 스윙걸즈가 어떤 곳에서는 최민식 주연의 영화 꽃피는 봄이오면이 연상이 되던 순간이었다. 아름다운 교향곡의 선율이나 재즈의 선율이 울려퍼지자 나는 자리에 멈춰 잠깐 숨을 돌리고 귀를 기울였다. 


 주변에는 학부모들이 자리를 잡아 아이들의 연주하는 모습을 찍고 있었고 친구들로 추정되는 아이들 역시 자기 친구들의 열연을 보며 흥겨워 하는 모습이었다. 각 학교에서 나온 합주부들은 골목 하나하나에 자리를 잡고서 각자가 준비한 합주곡들을 연주하며 가슴 속에 담겨진 이상과 그녀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며 건조했던 마음의 한구석을 촉촉히 적셔주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촉박한 시간으로 인하여 가슴을 흔드는 합주소리와는 고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합창을 하고 합주를 하는 아이들, 이중에서는 세일러문의 주제가를 연주한 학급도 있었다.-2015년 6월 6일 아사히카와 번화가. 


아사히카와에서 만난 수원 


 나에게 있어서 수원은 매우 각별한 도시이다. 물론 내가 태어나지도 않았고 수원에서 성장을 하지도 않았다. 내가 수원이라는 도시와 연을 맺은 건 다름 아닌 바로 축구 때문이었다. IMF의 후폭풍으로 인하여 쇠락해버린 가족들과 함께 사춘기를 보냈던 중학교 2학년 시절. 어느덧 지하방까지 내려와버린 나는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세상이 정말 밝고 할 수 있는 것이 많다고 믿었던 소년은 IMF구제금융이라는 풍파에 휩쓸려 자신의 공간조차 없고 불을 켜지 않으면 바깥세계와 단절이 되어버렸던 방에 앉아 외로이 TV를 보았다. 


 사실 당시에는 축구보다는 야구를 좋아하던 시절이었는데 98월드컵 이후 시작 프로축구의 르네상스 시대는 TV속에서 나를 축구로 이끌어주었고 스타스포츠에서 이따금씩 방영해주던 K리그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은 슬픈 소년에게 약간의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염세적인 소년이었던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학업성적이 급격히 떨어지고 때로는 불량한 아이들을 따라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세계를 한정지어 주변과의 관계를 끊기도 하였다. 


 앙골모아가 내려와 세계를 단죄하고 우리가 향유하던 세계를 멸망시켜버린다고 하였던 1999년, 나는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축구팀을 보게 되었다. 바로 수원삼성블루윙즈였다. 예부터 좋아하던 서정원이 수원으로 이적을 하고 98월드컵에서 벼락같은 슈팅과 함께 환상적인 플레이를 보여줬던 고종수가 뛰는 팀. 여기에 샤샤라는 걸출한 스트라이커와 바데아 데니스 비탈리 등으로 대표되는 공격진은 나의 심장을 뛰게 하기 충분하였다. 중학생 신분에 한달용돈 3만원이 채 안되던 내게 수원종합운동장은 분명 먼거리여서 경기장에 갈 수 없었지만 언제나 신문 속에서 티비 속에서 그들의 활약을 상상하였다. 


 시간이 흘러 성장한 나는 어느덧 대학생이 되어 빅버드를 찾게 되었다. 본래 2004년 챔피언 결정전에 갈려고 했으나 전날 마신 술로 인하여 결행을 포기하고 이듬해 대학입학을 기념하여 2005년 슈퍼컵에 오게 된 것이다. 얼마나 먼길이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 하지만 추위 속에서 티켓을 사고 자리에 앉아 선수들이 몸푸는 것을 보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돌고 돌아 드디어 내가 사랑하는 팀의 경기를 보게 되어 너무 기쁘다.' 


 다시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당시 21살이었던 나는 31살의 결혼적령기의 남성이 되어 홋카이도에 당도하였다. 그 사이 경기장에서 관람한 경기는 300경기가 훌쩍 넘어버렸고 K리그 클래식팀들이 사용하는 모든 홈구장은 다 가본, 진짜 열혈 축구팬이 되어 타국의 감상을 즐기기 위하여 1500km를 건너오게 된 것이다. 


매끈하게 뻗은 빌딩들이여! 나의 갈길을 경배해다오!!-2015년 6월 6일 아사히카와 번화가


 합주부들이 펼친 아름다운 선율의 강을 건너 토키와 공원 방면으로 길을 틀었을 때 많은 사람들의 인파와 마주쳤다. '토키와공원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 무렵 그 의문은 단시간만에 풀릴 수 있었다. 게다와 유카타를 챙겨입은 사람들, 가벼운 옷차림으로 서로 손을 잡고서 걸어가는 소녀들, 그렇다 바로 마츠리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정확한 이름은 파악할 수 없었지만 지역행사로서 상당히 큰 규모임에는 분명하였다. 지난해 교토에서는 카모가와의 개량을 축하하는 마츠리를 만났었는데 이번에는 주제는 모르겠으나 어쨌던 만났다. 


 인파들 사이를 해치며 나는 보다 가벼워진 기분으로 축제의 장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이게 왠걸, 어디서 많이 본 모양의 조각상이 있었고 매우 눈에 익은 글자가 보였다. 처마가 하늘끝으로 올라가고 방어력을 극도로 올릴 수 있도록 돌담으로 설계가 되어 있는 모양, 둥근 아치가 그려져 있는 입구, 이것은 다름아닌 수원 장안문의 모형을 본따 만든 조각상 아닌가. 믿겨지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1500km 건너 아사히카와에서 수원을 만났다는 것이 너무나도 반갑게만 느껴졌다. 


 내가 사랑하고 내가 마음 속에 절반을 할애하고 있는 축구팀이 있는 그 도시의 조형물을 이국에서 만나게 될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는데....너무나도 반가운 나머지 곧장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한 아이는 우리가 어릴적 남대문 놀이를 하듯 장안문을 통과하며 놀고 있었다. 


이곳 광장의 이름은 다름아닌 수원광장 양측의 자매결연을 기념하여 설치하였다.-2015년 6월 6일 아사히카와 수원광장. 


여행이란 축제의 연속


 사실 토키와 공원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약 30분여가 채 안걸렸다. 실제로는 15분 정도면 충분히 걸어올 수 있는 거리였지만 여기저기 골목골목 구경하느라 시간이 다소 지체되었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수많은 인파들과 볼거리와 놀거리는 바로 이것이 마츠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저기서 고기가 익는 냄새가 나고 오코노미야키가 구워지는 냄새가 났다. 소년 소녀들이 금붕어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고 꽃봉우리 모양의 아메를 든 소녀의 눈빛에서 세상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연인들이 손을 꼭 붙잡고서 하코다테산 오징어 구이를 먹고 소년은 아버지를 잃어버릴까 고사리손을 아버지 손에 잡고서 공원에 펼쳐진 만물을 별세계를 바라보듯 처다보는 모습, 옥수수구이를 내게 권하는 옥수수구이 아저씨, 솜사탕을 말아 아이에게 건내는 솜사탕 사장님,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에 나서면 수 많은 잡상인들이 모여 재미있는 물건들을 팔았는데 그 모습을 보는 것 처럼 추억에 휩싸였다. 


 여기저기서 굽고 튀기는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오코노미야키나 토리야키 같은 걸 사갈까 싶었지만 잠시 후에 저녁을 먹어야 하는 문제도 있었고 냄새가 나는 채로 비에이까지 가져가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진심으로 마츠리에 나와있는 문화와 음식을 즐기고 싶었지만 나의 소심함과 더불어 현실적으로 놓인 문제는 이를 단념할 수 밖에 없도록 하였다. 


축제라는 것은 항상 사람을 즐겁게 한다.-2015년 6월 6일 아사히카와 토키와 공원. 


 하지만 보는 것만으로 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람들의 미소가 내게 전이되어 나를 미소짓게 하고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한국에 놓고 온 수 많은 짐들이 나의 머리속에서 하나하나씩 사라져만 갔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 역시 냉정하게 바라보기 시작하였고 나의 미래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낙관을 하기 시작하였다. 소년과 소녀들의 웃음, 연인들의 행복한 모습. 나의 현실에 도치가 되면서 나와 그들이 일체가 되어 세상의 행복을 다 가진 느낌이었다. 


 행복의 바이러스가 나의 몸을 적시기 시작하였다. 항상 염세적으로 살아왔던 내가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조금이라도 희망을 품고서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에 있어서 매너리즘에 빠진 듯한 감각도 있었고 삶에 있어서도 매너리즘에 빠져 계발하기 보다는 그냥 현상유지를 바라던 내 모습이 이 곳에서 사람들의 웃음으로 정화가 되는 느낌이었다. 도처의 널린 벚꽃나무 사이로 벚꽃 대신 핀 이야기 꽃이 행복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공원의 반바퀴를 돌았나, 잠깐 한적한 곳으로 나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강둑같은 것이 보였고 많은 사람들이 거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 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올라가보니 강둑 위가 맞았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주말의 오후의 여유를 즐기며 마음을 정화시키고 있었다. 나 역시도 강을 바라보며 수 많은 생각을 하며 미소지으며 혼잣말을 하였다. 


"아 행복하다."


이시카리 강의 모습 산책하는 부부의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진다-2015년 6월 6일 아사히카와 토키와 공원 부근


 저 강건너 그리고 바다건너에는 나의 친구들과 나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리고 지금 이 여행기를 쓰는 지금은 연심을 잊었지만 당시에는 항상 머리속에 떠올라 나를 괴롭히던 그녀 역시 저 건너편에 있다. 하지만 내가 가진 모든 짐을 내려놓기 위해 여기까지 왔고 충분히 행복했다. 이것이 바로 여행이 주는 달콤함이며 노스텔지어. 수억만금과 바꿔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풍경이었다. 


 여행이라는 것은 삶에 있어서 계속된 축제라는 것을...


청조했던 그녀


 토키와 공원을 마저 돌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아사히카와 하면 역시나 라멘, 여기까지 왔으니 라멘을 먹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가이드북은 참고용으로만 사용하고 전적으로 따르지 않는데, 이 라멘집 만큼은 분위기가 너무나도 있어보여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하치야라멘이라는 가게였다. 1947년부터 영업을 시작했다는 이 라멘집은 육수의 풍미가 깊어 아는 사람들은 아는 집이라는 소개였다. 


 멀리 한국에서 여기까지 왔으니 이곳은 반드시 들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여기 골목을 찾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분명 위치는 맞는 것 같은데 지도와 이정표를 보며 대조를 한 끝에 정말 구석탱이에 잘 안보이는 간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로쿠죠 고쵸메 코지로라고 쓰여진 조그마한 간판, 그 안에 하치야 라멘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들어가서도 문제였던 것이 당췌 하치야 라멘이라는 곳이 보이지를 않았다. 


 여기서 내가 실수한 것이 있었는데 한자를 단순히 八家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짧은 일본어 지식이 이런 실수를 야기하고 만 것인데 실제로는 蜂屋였던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있던 나는 두번정도 골목을 돌아본 뒤 꼬치구이집 사이에 껴있는 라멘집을 발견하였다. 가격은 평균적으로 750엔 정도, 나는 배가 조금 고픈 상태였기 때문에 1050엔짜리 미소 차슈멘과 함께 맥주를 시켜 먹기로 하였다. 


도합 1450엔짜리 식사-2015년 6월 6일 아사히카와 하치야라멘 


 여기서 먹은 라멘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정말 잊을 수 없는 그런 맛이었다. 풍부한 건더기와 꼬불꼬불한 면, 미소와 어우러진 돈골육수는 추위에 얼어버린 몸을 녹여주는 동시에 청량감을 주기 충분하였다. 여기에 조금은 허름한 인테리어와 주방너머로 보이는 솥의 모습, 그리고 여느시골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백반집과 같은 모습은 나의 혀를 자극하고 시각적 미각적 만족을 보여주기 충분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열차시간은 약 40분여가 남아있었다. "맛있게 먹었습니다."라는 말을 건냄과 동시에 돈을 지불하고 다시 아사히카와역으로 향하였다. 이곳에 언제 다시 올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의 라멘 맛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알츠하이머를 앓거나 코마상태에 빠지지 않는한 계속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조금씩 어둠이 내려오는 동안 아사히카와역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아까 보였던 스윙걸즈들은 모두 철수를 하여 집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합주가 펼쳐졌던 세계는 다시 사람들의 걸음걸이로 북적이기 시작하였고 나는 이곳 아사히카와에서 비에이로 넘어가야만 했다. 일정의 협소함과 시간이 너무나도 아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후라노선 보통열차 안에서-2015년 6월 6일 니시세와역


 오랜만에 디젤동차에 몸을 태웠다. 목가적 감상에 취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갑자기 문이 닫히는 것이 아닌가. 분명 6시 41분에 후라노로 향하는 열차인데 벌써 문을 닫다니, 혹시라도 내가 열차를 잘못탄건 아닌가. 분명 행선판에는 후라노라고 써있었는데, 당황한 나머지 내리려고 하는 차장을 붙잡고 물어봤다. 혹시라도 출발할까 하는 노파심에...


"죄송한데요, 이거 후라노행 열차 맞나요?"

"네 후라노행 맞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십년 감수한 기분이었다. 여기서 열차를 잘못탔다간 비에이에 절대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일 뿐더러 위약금까지 물어야 했기때문이다. 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 시골 들어가는 노선들은 어쨌던 영업이 일찍 끝난다. 


 그리고 다시 안심하고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여자 고등학생이랑 자꾸 눈이 마주쳤었는데 하얀 피부와 태양아래 바다처럼 맑은 눈망울, 긴생머리와 갸름한 미형의 얼굴이 너무나도 예쁘게 보였다. 그 여학생도 자꾸만 나를 처다봤는데 딱히 의심하는 눈빛은 아니었다.―내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정말 청조한 매력이 느껴지는 소녀였다. 정말 내 나이가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이윽고 디젤엔진의 출력이 올라가며 비에이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디젤동차는 2007년 한국에서 임진강으로 향하던 통근열차를 탄 이후 8년만에 타보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일부구간을 제외하고 구경을 할 수 없는 녀석인데 멀리 이곳에서 타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거기다 풍경들도 완전 시골이니 당시에 마음을 추스리려 임진각으로 향하며 보았던 파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치 데자뷰처럼.


치요가오카역의 모습, 후라노선은 지선계통에 인구밀집지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간이역사 수준의 역이 많다.-2015년 6월 6일 후라노선 치요가오카역


 내 나이 또래쯤 보이는 청년이 맞은편에 앉아도 되냐고 물어봤다. 당연히 되지요. 그런걸 뭘 묻고 그러시나요. 그 순간 다시 살포시 옆을 바라보니 그 여학생과 눈이 맞았다. 당연히 의심을 피하는 동시에 부끄러움 속에 눈을 흘겼다. 그렇게 40분 동안 시골의 목가적인 풍경을 즐기는 동시에 알 수 없는 설레임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리고 도착한 비에이, 내리는 순간 다시 눈이 마주쳤다. 아마도 후라노나 다른 지역에서 아사히카와로 통학하는 여학생임이 분명하다. 나는 여기서 출퇴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개 여행객이기 때문에 그저 스쳐지나갈 수 밖에 없었다. 


잘가요 보통열차, 내일 또 만나요-2015년 6월 6일 비에이역. 


함께라면 보다 행복했을텐데.


 비에이역 역시 매우 조그마한 역이었다. 한국으로 따지면 대략 영동역 정도? 주변엔 울타리조차 없어 더욱 초라해 보였다. 그러나 석조로 만들어진 역사는 이 동네에서 가장 멋진 명물임을 뽑내듯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역을 빠져나와 이제 숙소로 향하였다. 숙소는 코에루라는 민박집. 이 코에루라는 민박집은 철도 건너편에 위치한 숙소인데 내리자 마자 맞은편에 보였다. 그러나 육교를 건너 가야하는데 공부한 대로 큰 육교를 향해 가던 중 갑자기 이 길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 시작되었다. 


 거기다 건너편 플랫폼으로 이동하는 육교가 보이길래 저곳을 건너면 왠지 출구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결국 발길을 돌려 건너편 플랫폼으로 왔다. 사실 그것은 크나큰 실수였음이 눈 앞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밖으로 나가는 출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다시 역을 건너 역사를 통과하여 앞에 놓은 큰 육교를 통해 숙소로 향하였다. 숙소에 도착하자 그냥 가정집과 같은 대문이 나를 반기고 식당 내부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주인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방안내와 더불어 식사시간, 요금 지불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근데 외국인이 일본어로 이야기하는 것이 몹시 신기하셨나보다. 계속 옆에서 잘한다고 칭찬을 하니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사실 반정도는 못알아듣는 경우가 태반인데 말이다. 


 방에 짐을 푼 뒤 주인아주머니께 편의점 위치를 확인하고 편의점으로 나섰다. 편의점에서 간단한 주전부리와 함께 술을 구입하였다. 사실 본래는 도착해서 동네구경을 좀 할려고 했는데 막상 도착하여 보니 정말 아무것도 없는 동네였다. 동네의 크기 자체가 무주읍보다 조금 작은 수준에 밤문화라는 것이 존재하지를 않는 동네였다. 거기다 대부분의 가게는 문을 닫은 것을 확인하고 숙소에서 티비를 보며 카톡으로 담소를 나누며 휴식을 취하자는 생각 뿐이었다. 


조용하고 한적한 도시 비에이, 이곳에는 최근 관광객이 넘친다-2015년 6월 6일 비에이역앞. 


 추위를 느끼는 나는 난로를 켰다 껐다를 반복하며 편의점에서 사온 술과 안주를 먹으면서 AKB48의 총선거를 시청하였다.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딱히 재미있는 방송이 없어 부득이 볼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생각보다 상당한 재미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책상을 보니 여행자들의 일기장이 있었다. 분명 수 많은 여행자들의 흔적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어보니 예상대로 여기에는 다양한 언어로 여행에 대한 낭만들이 적혀 있었다. 


 수개월 전 이곳에 많은 눈이 왔을 때 적은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인의 글도 보였고 이곳에 가족여행을 와 행복한 시간을 보낸 사람도 보였다. 또한 일본의 각지에서 온 여행객들이 쓰고 간 낭만들이 나의 가슴 속에 노스텔지어를 불지피고 있었다. 때로는 사랑하는 가족과 때로는 사랑하는 연인과 왔던 그 흔적들! 


 나 역시도 그 일기에 내 이야기를 두가지 언어로 적어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정말 조용하고 단아한 매력이 있는 비에이에 와서 행복을 느끼고 있습니다. 조금은 피곤하기도 하지만 마음이 점점 가벼워 지는 것 같아 행복해지는 것 같습니다. 가까운 미래에 꼭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는 혼자가 아닌 둘이서 이곳에 오겠습니다. 2015년 6월 6일 신승윤" 


 밖에는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여름의 문턱을 방해하고자 하는 비, 마음 속의 때가 씻겨내려가는 느낌과 동시에 외로움이 가속화 되기 시작하였다. 혼자 온 여행, 누군가에게 나누어주고 싶던 사랑을 혼자 간직한 채 온 낭만의 장소.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세계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영위하고 있는 세계에 홀로 앉아 빗소리를 벗삼아 혼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혼잣말을 하였다.


"함께라면 보다 행복했을텐데"


석양마저 사라진 비에이역의 저녁-2015년 6월 6일 비에이역


다음편에서 계속



Posted by 석유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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